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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쾨르, 변광배, 전종윤 공역
폴 리쾨르, 비판과 확신
38 그린비 출판사(2013)
『폴 리쾨르, 비판과 확신』(La critique et la conviction)은 리쾨르가 타계하기 10여 년 전인 1994~1995년 그의 연구실에서 진행된 인터뷰를 엮은 책이다. 리쾨르의 자서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가족적 배경과 젊은 날의 독서 이력에서부터 철학 공부를 시작하기까지,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포로수용소에서 경험한 일들, 여러 학자들과의 만남 등 자신의 삶과 지적 여정에 대해 진솔한 얘기를 들려 준다. 이 책은 이처럼 풍부한 그의 삶과 사유를 솔직하고 사적인 문체로 조명하고 있으며, 『의지의 철학』, 『해석의 갈등』, 『살아 있는 은유』, 『시간과 이야기』, 『타자로서 자기 자신』 등 그의 주요 저서 대부분을 다루고 있어서 리쾨르 읽기를 시작하는 독자들에게 가장 좋은 입문서가 될 것이다.

솔직하고 내밀한 삶 이야기 : 처음부터 철학자는 아니었다

리쾨르는 ‘여기에서는 살아가는 방식이 생각하는 방식에 우선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처음으로 시도해 보는 이러한 대담 형태의 이야기에 대한 기대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주로 글을 써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발표하는 그이지만, 퇴고할 수 없고 통제가 덜 된 ‘말’이라는 언어 형태를 통해 자신의 사유 방식에 새롭게 접근해 보겠다는 다짐으로 대담집의 문을 연다.
리쾨르의 성장기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1913년 프랑스 발랑스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품에서도 떨어져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그림자 안에서 설정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유년기를 보내고, 십대 때는 두 살 위 누나를 폐결핵으로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누나를 떠올릴 때면 갚지 못한 빚에 대한 죄책감이 가슴 속 깊이 맺혀 있음을 느낀다고 고백하는데, 이러한 ‘갚지 못한 빚’은 그의 저작들에서 집요하게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의 반성적 성찰의 뿌리는 이러한 가족적 배경에까지 닿아 있는 것이다. 종교에 대한 그의 사유도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가톨릭적 분위기가 강했던 렌에서 신교도로서 느낀 소외감에 대한 얘기도 들을 수 있다. 이처럼 리쾨르는 어린 시절 그리 활발한 성격은 아니었는데 그런 이유로 책과 더욱 가까이 지냈다고 말한다.
대담 중에 그는 고등학생 시절 읽었던 디드로, 볼테르, 루소 등 고전들을 회상하며, 그를 더 넓은 철학 세계에 눈뜨게 해 준 롤랑 달비에즈 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그는 달비에즈 선생과의 만남을 그의 학창 시절에 있었던 ‘대사건’, ‘경탄’이라고까지 말한다. 그 밖에 라캉과의 에피소드에서 두 사상가 사이에 얽힌 오해와 진실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고,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사이의 갈등이나 야스퍼스와 하이데거의 대립, 가브리엘 마르셀, 미르체아 엘리아데, 칼 야스퍼스,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등 그와 영향을 주고받은 여러 철학자들과의 만남에 대한 리쾨르의 이야기를 들으며 당대 프랑스 지성계의 분위기에 대해서도 흥미롭게 그려 볼 수 있다.

“저는 양쪽 모두에 충실하면서도 그 두 영역을 혼동하지 않으려는, 잘 정립된 양극성 내에서 계속 타협하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제게는 철학 수업이 커다란 시련이었습니다.”(본문 24쪽)

리쾨르도 솔직하게 밝히고 있듯이, 사실 그는 처음부터 철학을 전공하려 했던 것도 아니고(문학을 전공하려고 했다) 뒤늦게 고등사범학교 진학을 준비했으나 실패하기도 했다. 더욱이 전쟁고아였기 때문에 공부를 빨리 마치고 생계를 위해 ‘교육계에 던져져’ 가르쳐야 했다. 그는 처음부터 철학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것도, 철학 공부를 하기에 좋은 환경에서 자란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리쾨르는 모든 학문과 대화하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고, 인간 존재의 한계를 절박하게 끝까지 성찰하면서도 초월적 존재인 신에 대한 믿음을 이해하고 밝혀 내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도 때로는 극심한 내적 갈등에 부딪히기도 했으나, 자신의 신념을 지켜 내려는 의지와 지적 성실함으로 견고하고 거대한 지적 성채를 이루어 낸 것이다.

반성적 철학자의 고집스러운 성실함 : 양쪽 모두에 충실하리라

“저의 주된 관심사가 오히려 개인적 차원에 속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화해하지 못하는 두 사상의 흐름의 교차점에 위치한 상황으로 생겨난 대립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 지적 정직성에 관련된 이 문제는 항상 비장한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영감을 준 한 노선뿐만이 아니라, 다른 노선도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본문 67~68쪽)

리쾨르가 활동한 20세기 중반은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전체주의의 상승으로 혼란한 시대였다. 프랑스 내부에서도 드골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여러 정치적 노선들의 겹침과 대립으로 혼란했고 프랑스공화국에 대한 엇갈리는 목소리들이 분분했으며, 리쾨르 역시 사회주의 단체에 소속되어 정치적 활동을 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정치적 참여를 하기 위해, 기독교와 사회주의 양쪽 모두에 충실하며 그 둘을 혼동하지 않고 유연하게 연결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한다. 이 대담집에서는 이와 같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리쾨르의 현실 정치적 참여와 그의 개인적인 고뇌들에 대해서도 읽을 수 있다.

리쾨르는 그가 선택한 노선이 소련과 공산주의의 유혹에 맞서기 위한 무정부주의-조합주의적 비전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말하는데, 훗날 그는 과거에 자신이 선택했던 정치적 노선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하고 자책하기도 한다.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에 대해 보고 들은 것,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포로수용소에 갇혀 5년 동안 지냈던 경험 등으로 인해 정치적인 것에 대한 그의 견해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혼란했던 20세기 현대사를 통과하며 리쾨르는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해서도 그만의 독특한 시각을 빚어냈다. 포로수용소 시절에도 그는 다행히 괴테, 실러와 다양한 독일 고전들을 읽으며 지적 자양분을 쌓을 수 있었고, 후설의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번역을 시작하기도 했다. 또한 이 시절에 흡수한 독일 철학적 배경은 리쾨르 철학의 토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리쾨르는 이처럼 끊임없는 성찰 끝에 무언가를 결정하고, 그가 선택했던 것에 대해 훗날까지 철저하게 반성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반성적 성찰은, 모든 사람은 진리의 작은 조각을 가질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어느 한편에만 치우치지 않으리라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태도가 그를 점차 보수적이고 정치적 판단을 유보하도록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이 대담집에서 리쾨르는 그가 낭테르대학 총장으로 있었던 68혁명 당시에 대해서도 회고하는데, 그가 대학 캠퍼스에 경찰 진입을 허용했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수많은 말을 낳았고 결국 그가 총장직을 사임했던 그 사건은 리쾨르에게 또 한 번의 반성적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끊임없이 반성하는 리쾨르의 삶을 읽으며, 우리가 현실 속 복잡한 갈등 관계에 부딪혔을 때 어떤 자세를 취하고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학생들과 진정 어린 관계를 맺고 그들이 발전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고 말하는 리쾨르는, 낭테르대학에 있을 때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공동체라는 이상을 가지고 학생들을 대학 운영위원회에 포함시키자는 주장을 지지하기도 했으나, 68혁명을 겪으며 그의 생각은 또 한 번 달라진 것이다. 68혁명을 돌아보며 지배의 수직적 관계와 공동 체험의 수평적 관계를 조합시키는 문제에 대해서 불가능한 꿈을 꾸었고, 실패했으며, 그 경험으로 훗날 정치적인 것에 대해 더 깊은 사색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하는 리쾨르에 대해, 이제는 우리가 그를 해석할 차례일 것이다.

대화로 넓혀 가는 삶의 지평 : 다툼을 중재하고 의미를 발굴하다

소통과 통합이 화두인 시대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극단적인 양극화로 갈등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그 양극성을 통감하고 내적 갈등을 겪으며, 그것들을 모두 끌어안고 종합하기를 숙명으로 알고 살아 낸 사람이 있다. 온갖 이데올로기들이 날선 칼날을 휘두르던 세월 속에서도 그는 더 적은 이데올로기적 판단과 더 많은 반성적 대화와 소통에 대한 신념을 견지했다. 이러한 신념 덕분에 리쾨르는 남과 다른 자기만의 차이를 부각시키지 않았음에도 체계적이고 방대한 그만의 독창적인 철학 세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태도는 시대가 바뀌어도 바래지 않는 것일 테다.
리쾨르는 갈등의 한복판에서 그 한계까지 충실히 해석하고자 했다. 갈등하는 것들은 리쾨르와의 대화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고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그의 대화법은 어떠한 목표를 관철시키기 위한 목적의 대화가 아니라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가 만나 삶의 지평을 넓혀 가는 대화였던 것이다. 이러한 리쾨르의 대화 철학을 잘 실천하고 있는 대담집 『폴 리쾨르, 비판과 확신』에서 그와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무궁무진하다. 그와의 대화 속에서는 미학과 윤리학이 만나고 종교와 정치가 겹쳐진다. 기억과 책임의 문제에 대해서도 리쾨르는 도덕적․법적․정치적 차원에서 다층적으로 고찰한다. 다문화주의는 종교, 언어, 교육의 측면에서 다양하게 다루어지며, ‘보편성’이나 ‘시민’의 개념은 서로 다른 역사를 지닌 프랑스와 미국에서 조금씩 다른 의미로 통용된다는 것을 짚어 낸다. 리쾨르는 그에게 민감한 주제인 종교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발끈해서 말이 길어지기도 하는데, 이처럼 다른 학술 저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의 인간적인 솔직한 면모들을 읽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이 대담집을 읽는 하나의 재미일 것이다. 이 책의 출간으로 그의 학문적 업적뿐만 아니라 텍스트와 삶을 마주하는 그의 겸손하고 성실한 인간적인 면모까지 재조명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린비 출판사 블로그에서 가져온 것임)